제네바신학대학원 종교개혁지 탐방(3) – 비텐베르크에서 프라하까지(6.24-6.28)

제네바신학대학원 종교개혁지 탐방(3) – 비텐베르크에서 프라하까지(6.24-6.28)

6월 24일(월) 일정은 비텐베르크 안의 루터의 유산을 둘러보고 베를린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일행은 오전 10시까지 산책 및 휴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날 첫 번째 일정은 호텔 바로 옆에 있는 루터하우스(Lutherhaus)를 답사하는 것이었다. 루터하우스는 종교개혁 전에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회 수도원 건물로 사용되었는데, 종교개혁으로 수도원이 해체되자 작센의 선제후가 루터에게 집으로 선물로 주었다. 이 집의 살림을 맡았던 사람은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였다. 그녀는 루터를 대신해 수도원 건물을 유지하고, 루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등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루터가 개혁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데에는 폰 보라의 수고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 루터하우스는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한 루터의 종교개혁운동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시물 중에 특히 면죄부와 면죄부를 구매한 돈을 넣은 함은 일행의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종교개혁 이전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95개 논제가 면죄부와 같은 방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가이드의 설명으로 그 배경을 알게 되니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박물관에는 1520년에 작성한 루터의 3대 논문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고함>,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비롯하여 <대요리문답>(1529), 루터가 번역한 성경전서(1534),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이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0)를 비롯한 수많은 저술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작품들은 인쇄기술을 통해 유럽에 퍼져 많은 영향을 미쳤다. 1시간 30분동안 박물관을 들러보면서 일행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루터하우스를 둘러본 일행은 비텐베르크 외곽에 있는 작은 공터로 향했다. 이곳은 루터가 1520년 자신을 파문한 교황 레오 10세의 교서와 교회법 서적, 스콜라주의 신학 서적을 불태운 곳이었다. 로마 천주교와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곳은 종교개혁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反) 성경적 또는 비(非) 성경적 사상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단절하는 것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일행은 시(市) 교회당으로 향했다. 시 교회당 안에는 루터의 교회론의 핵심이 담긴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세례와 성찬과 죄 용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교하는 설교자에 대한 그림이었다. 가이드를 통해 그림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들은 일행은 오늘날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또한 가이드를 통해 이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요하네스 부겐하겐을 통해 참된 목회가 무엇인지,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

비텐베르크에서 마지막 일정은 성채교회당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교회당에 입장하기 전에 루터가 95개 논제를 게시했던 문 앞에 서서 95개 논제의 의미와 가치를 기억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 루터교회는 이 문에 95개 논제를 새겨 놓아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이 루터가 활동한 도시임을 각인시키고 있었다. 일행은 성채교회당으로 들어갔다. 내부 사정으로 인해 오랜 시간 머물지 못했으나 예배당 안에 남겨진 루터의 흔적을 보기엔 충분했다. 일행은 비텐베르크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2시간을 이동하여 베를린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6월 25일(화) 오전 일정은 베를린 시내의 독일의 근‧현대사와 관련된 장소를 답사하는 것이었다. 먼저, 홀로코스트 추모공원을 둘러보았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당한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도심에 세운 것이었다. 일행은 무덤을 상징하는 콘크리트구조물을 이동하면서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한 것임을, 그리고 그 역사를 남김없이 가르치는 독일의 자기 반성을 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브란덴부르크 문이었다. 옛 독일 제국의 위대함과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이 건축물에서 비슷한 역사를 통과한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 볼수 있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베를린 장벽의 일부와 동‧서 베를린의 경계에 있었던 검문소인 체크포인트를 보면서 죄로 타락한 인간이 벌인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답사한 곳은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당이었다. 현재 이 교회당의 옛 건물은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독일인들은 옛 예배당을 다시 세우지 않고 그 옆에 새로운 예배당을 지었다. 전쟁의 참혹함과 그 결과를 기억하려는 독일인의 철저함을 상징하는 예배당이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건물은 무너지고 만다는 중요한 교훈을 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행은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후 5시간을 이동해 종교개혁탐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체코 프라하에 도착했다. 가이드를 만나 저녁식사를 하고 체코의 위대한 왕인 카를 4세에 의해 건축된 카를 교를 둘러보고 트램을 이용해 시내를 둘러본 다음 숙소로 이동하여 다음 날을 준비했다.

 

6월 26일(수) 오전 일정은 체코 남부의 도시 타보르(Tabor)를 답사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후스의 사상을 따르고자 했던 급진 후스파인 ‘타보르파’의 요새도시로 프라하에서 1시간 30분 거리에 있었다. 일행은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후스파 박물관 지하에 조성된 생활공간을 먼저 둘러보았다. 로마 천주교 군대가 침입했을 때 주민들이 몸을 피해 숨어 살아갔던 장소였다. 믿음을 지키는 것은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새삼 배울 수 있었다. 급진 후스파는 얀 지슈카(Jan Žižka, 1360~1424) 장군이 지도했는데 그가 생존했을 때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 후 급진 후스파는 1534년 로마 천주교 군대에 의해 괴멸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일부는 살아남아 현재까지 형제연합교회를 이루고 있다. 박물관에는 이들과 16세기 종교개혁을 연결 짓는 도표가 남아있어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역사의 흐름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점심식사 후 일행은 프라하로 돌아왔다. 프라하 성을 둘러보았다. 프라하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성 비투스 성당의 화려한 외부와 내부를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눈에 보이는 위대함을 강조하고자 한 로마 천주교의 ‘영광의 신학’을 생각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루터가 말한 ‘십자가의 신학’, 즉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그분과 함께 고난을 기꺼이 받으며 미래의 소망을 사모하는 것이 우리의 갈 길 임을 생각할 수 있었다.

프라하 성을 내려온 일행은 트램을 타고 구 시가지에 들어갔다. 얀 후스(Jan Hus, 1372~1415)가 1402년부터 설교하며 개혁사상을 가르친 곳이었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성경을 따라 살아갔던 후스는 로마 천주교에 의해 화형 당했지만, 그의 신앙과 정신은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살아남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을 기억할 수 있었다. 일행은 구시가지 광장으로 이동하여 광장 한 복판에 있는 후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동상, 신앙 때문에 죽임당한 27명의 성도의 처형장소를 보았다. 이후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로 이동했다.

 

6월 27일(목), 일행은 호텔을 나와 프라하 시내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마쳤다. 러시아항공 SU2019편은 험한 난기류를 돌파하여 러시아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환승 수속을 신속히 마친 일행은 러시아항공 SU250을 타고 9시간을 이동하여 6월 28일(금) 오전 11시 10분 경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렇게 제네바신학대학원대학교의 종교개혁탐사 모든 일정이 끝났다. 12일 간의 모든 일정을 선하게 인도하시고 일행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번 탐사에서 보고 배웠던 모든 것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굳건히 세워지는데 유익하게 사용되기를 소망한다.

 

글 : 김석현 원우회장 / 사진·편집 : 신동근 원우